[조선 5대 궁궐]덕수궁의 역사와 건축물 관람 정보
오늘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과 함께 조선 시대의 5대 궁궐 중 하나로 불리는 덕수궁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덕수궁의 역사
현재 우리가 덕수궁이라고 부르는 궁궐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입니다. 이곳은 원래 조선 제9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私邸)였는데,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갔다가 돌아온 선조가 도성 내의 궁궐들이 모두 불타 거처할 곳이 없게 되자 월산대군의 저택을 개보수해 임시 궁궐로 사용하면서 정릉행궁 또는 정릉동 행궁(貞陵洞 行宮)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1611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이거(移居)하면서 이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고 이름을 지으며 정식 궁궐이 되었습니다.
이후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가 경운궁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는데, 인조는 경운궁에서 거처하지 않고 창덕궁으로 옮겨가고, 즉조당과 석어당 단 2채를 제외하고 경운궁의 나머지 가옥과 대지를 모두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는데 이로 인해 경운궁은 두 채의 건물만 남긴 채, 한적한 별궁 정도로 축소되었습니다. 그 이후 1896년 아관파천(고종과 왕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임시 피신한 사건)으로 고종이 다시 이곳으로 오기까지 경운궁은 약 274년간 역사에서 잊힌 궁궐이 되었습니다.
1896년 고종이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아관파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나라를 새로 일으킬 결심으로 도심에 경운궁을 새로 짓게 하였고,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황궁(皇宮)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후 황궁에 맞게 규모를 확장하고 격식을 높였으며, 궁궐 내 서양식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전통 건축물과 서양식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904년 궐내(闕內) 함녕전의 온돌 교체공사 도중에 화재가 발생하여 중화전, 중화문을 비롯한 주요 목조건물들이 대부분 소실되었다가 1906년 다시 중건되었습니다.
1905년 중명전에서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내용의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후 고종은 1907년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였는데(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 일제는 이를 이유로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왕으로 즉위하게 하였습니다.
돈덕전에서 즉위식을 한 순종은 즉위 4달 후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고종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담아 '덕스러울 덕(德)', '목숨 수(壽)'의 덕수라는 궁호(宮號)를 지어 올린 이후, 경운궁은 덕수궁(德壽宮)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다만, '덕수'라는 이름은 조선 초 정종 때 상왕으로 물러난 태조가 살았던 궁에도 붙여진 이름으로, 덕수궁은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왕의 자리에 물러난 상왕이 살았던 궁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볼 수 있습니다.
고종은 1919년 승하할 때까지 덕수궁에서 지냈는데, 고종 승하 이후 덕수궁의 규모가 대폭 축소되어 대부분의 건물들이 철거되고 동시에 공원화가 진행되어 궁궐로서의 면모를 잃게 되었는데, 이후 덕수궁의 복원이 꾸준히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덕수궁 주요 건축물
대한문
대한문(大漢門)은 현재 덕수궁의 정문입니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었던 인화문(仁化門)이었는데, 인화문은 남쪽 정면을 언덕이 가로막고 있어서 앞으로 길이 뻗어나가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동문인 대안문(大安門) 주변이 환구단을 비롯하여 새로운 도심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정문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904년 발생한 화재 사건으로 덕수궁 주요 건물을 다시 지으면서 1906년 대안문도 수리하였는데, 이때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바꾸었습니다. 대한문(大漢門)이라는 이름에는 한양 산하의 아름다움과 경운궁이 법전인 중화전을 갖추고 정문으로 대한문을 갖춤으로써 궁궐 제도를 완비한 것을 노래하고, 소한(霄漢)과 운한(雲漢) 등 하늘을 가리키는 한(漢)이라는 글자가 담겨있습니다.
중화전
중화전(中和殿)은 덕수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으로, ‘중화’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이라는 뜻입니다.
고종이 이곳에 환궁한 후 5년 정도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였다가 1902년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처럼 중층 구조의 겹지붕으로 중화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1904년 대화재로 소실된 후 다시 지으면서 1층 규모로 중건하였습니다. 중화전 마당에는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서 있는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석어당
석어당(昔御堂)은 즉조당과 함께 덕수궁의 모태가 되는 건물로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는데, ‘석어’는 ‘옛날에 임어(왕이 왕림)하다’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가 임시로 거처했던 곳입니다.
광해군 대에는 선조의 왕비 인목왕후가 유폐되기도 하였고, 1623년 인조반정 후 광해군을 문책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조는 경운궁의 전각 대부분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나 석어당과 즉조당은 보존하였습니다. 석어당은 덕수궁에 있는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2층 건물이자 단청을 하지 않은 건물입니다.
준명당, 즉조당
즉조당(卽阼堂)은 석어당과 함께 덕수궁의 모태가 되는 건물로, ‘즉조’는 ‘왕의 즉위’라는 뜻입니다. 이곳에서 15대 광해군과 16대 인조가 왕위에 올랐고, 1897년 대한제국 이후에는 정전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때 이름을 태극전, 중화전으로 불렀다가 1902년 중화전이 세워지면서 다시 즉조당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고종의 후궁인 황귀비 엄씨가 생활하다가 1911년에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합니다.
준명당(浚眀堂)은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된 건물로, ‘준명’은 ‘다스려 밝힌다’라는 뜻입니다. 이곳은 즉조당과 함께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음 해에 복원하였습니다. 이곳은 1916년 고종의 딸 덕혜옹주의 교육을 위해 유치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석조전
석조전(石造殿)은 고종이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서양식 석조건물로, ‘석조’는 ‘돌로 짓다’라는 뜻입니다. 영국인 하딩이 설계한 이 건물은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석조전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에 설계를 시작해서 13년이 지난 1910년에 완성이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대한제국이 멸망하였기 때문에, 석조전은 한 번도 대한제국의 공관으로서 사용되지 못하였습니다.
석조전은 서양의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건물의 앞과 동서 양면에 발코니가 설치된 것이 특징인데, 1층에는 접견실과 귀빈 대기실, 대식당 등이 있고 2층은 황제와 황후가 거처하는 침실과 여러 용도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고종은 석조전을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을 만나기 위한 접견실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고종이 세상을 떠난 후 덕수궁이 훼손되는 과정에서 석조전은 일본 미술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사용되었고, 광복 후 1946년부터 1947년까지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사용하였고, 1948년부터 1950년까지는 유엔 한국위원단의 사무실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하였다가 2009년부터 복원공사를 하여 현재는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함녕전, 광명문
함녕전(咸寧殿)은 1897년 고종의 환궁과 함께 지어진 황제의 침전으로, ‘함녕’은 ‘모두가 평안하다’라는 뜻입니다. 1904년 함녕전 온돌 수리공사 중 일어난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 다시 지었습니다. 고종은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1919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광명문(光明門)은 함녕전의 정문으로 ‘광명’은 ‘밝음을 맞다’라는 뜻입니다. 1938년 일제에 의해 중화문의 서남쪽으로 옮겨져 보루각 자격루와 흥천사 동종 등을 전시하였다가, 2018년 약 80여 년 만에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졌다고 합니다.
덕홍전
덕홍전(德弘殿)의 ‘덕홍’은 ‘덕이 넓고 크다’라는 뜻으로, 이곳은 원래 고종의 황후인 명성황후의 혼전(왕과 왕비의 신주를 종묘로 모시기 전까지 임시로 신주를 모시는 건물)인 경효전이 있었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고종은 고위 관료와 외교 사절 등 빈객을 접대하기 위한 접견실로 사용하였는데, 원래 덕홍전 주위에는 행각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행각 일부만 함녕전 남행각에 맞닿아 있습니다.
정관헌
정관헌(靜觀軒)의 ‘정관’은 ‘고요히 바라보다’라는 뜻으로, 『고종실록』에 의하면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임시로 봉안했던 장소로 사용하였습니다. 정관헌은 동서양의 양식을 모두 갖춘 건물인데 기단 위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인조석 기둥을 둘러서 내부 공간을 만들었고, 바깥에는 동·남·서 세 방향에 기둥을 세운 포치(건물의 입주나 현관에 지붕을 갖춘 곳)가 있고,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 등의 전통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커피 애호가였던 고종은 정관헌에서 커피를 즐겨 마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러시아어 통역관으로서 한 때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김홍륙이 비리가 발각되어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되자, 떠나기 직전에 원한을 품고 고종이 즐겨 마시는 커피에 아편을 넣어 살해하려고 한 독살사건이 발각되어 반역죄로 참수된 일이 있었습니다.
돈덕전
돈덕전(惇德殿)은 1902년~1903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행사(칭경예식)를 위해 지은 건물로, ‘돈덕’은 ‘덕이 도탑다’라는 뜻입니다. 화려한 유럽풍 외관의 벽돌로 지어진 돈덕전은 1층은 폐현실, 2층에는 침실이 자리하였으며, 각국 외교사절의 폐현(황제나 황후를 만나는 일) 및 연회장, 국빈급 외국인의 숙소로 사용하였습니다.
돈덕전은 1907년에 순종이 황제 즉위식을 가졌던 곳인데, 고종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방치되었다가 1920년대에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2023년에 재건하였습니다.
중명전
중명전(重眀殿)의 ‘중명’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다’라는 뜻으로, 1897년 황실 도서관으로 지어진 후 수옥헌(漱玉軒)이라고 불렸습니다. 1904년 화재로 고종이 이곳을 임시 거처로 사용하면서, 편전 겸 접견소로 이용하였는데, 수옥헌이 중명전으로 불리게 된 것은 1906년 이후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중명전은 1905년 을사늑약(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중명전은 일제강점기 이후 민간에게 팔렸다가 활용하다가, 다시 정부에서 사들여 2009년에 복원공사하여 2010년부터 전시관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중명전은 지금 덕수궁과 거리가 좀 있는 곳에 따로 있는데, 과거에도 중명전은 덕수궁(당시 경운궁)에 포함되지 않았던 것으로 인식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례로 1907년 중명전에 있던 순종이 새 황제가 되면서 경운궁으로 '이어'하면서 궁내부로 하여금 급히 수리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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