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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 볼거리

[조선 5대 궁궐]창경궁의 역사와 건축물 관람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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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경희궁과 함께 조선시대 5대 궁궐로 불리는 창경궁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우리나라 궁궐의 역사와 아름다움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특히 아이들과 함께 관람하고 체험한다면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좋은 공부가 될 것입니다.
 

명전전 전경 ⓒ 궁능유적본부

  
 

 
 

창경궁의 역사

 
조선의 3대 왕인 태종이 1418년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날 때 창덕궁 옆 현재 창경궁 자리에 별궁을 지어 거처로 삼으면서 그 이름을 수강궁(壽康宮)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1483년 조선의 9대 왕인 성종이 세 명의 대비(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덕종의 왕비 소혜왕후, 예종의 왕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수강궁을 크게 확장하고 궁의 이름을 창경궁( 昌慶宮)이라 하였습니다. 창경궁은 창(昌: 창성할 창), 경(慶: 경사 경)이라는 글자 그대로 '창성(기세가 크게 일어나 잘 뻗어 나가다)하고 경사스럽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홍화문 ⓒ 궁능유적본부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함께 '동궐'(東闕)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는 동시에 각각 독자적으로 궁궐로서의 공간구조를 갖추고 있었지만 창경궁은 완벽한 궁궐로서의 구조와 기능을 갖추고 있지는 않았고, 실질적으로는 창덕궁에 부족한 주거 공간의 보완이 주 기능이었던 궁궐이었습니다. 
 

명정문 및 행각 ⓒ 궁능유적본부

 
창경궁은 1592년 임진왜란 때 경복궁, 창덕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타 소실되었는데, 광해군 때인 1616년 중건되었고, 그 후 1830년(순조 30) 대화재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다가 4년 뒤인 1834년에 중건되었습니다.
 

함인정 전경 ⓒ 궁능유적본부

 
1907년 일제가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왕으로 즉위하게 한 후 고종은 그대로 덕수궁(당시 경운궁)에 머물게 하고, 순종만 창덕궁으로 이어하게 하였습니다. 일제는 1909년 창덕궁으로 이어하는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창경궁의 궐내 각사(관청)가 있던 곳 일대에 동물원을 설치하는 한편 이때 식물원도 함께 조성하면서 그곳에 있던 건물들이 많이 철거되었고, 이름도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되어 궁궐이 아닌 공원화가 되어 심각하게 훼손되었습니다.
 

춘당지 전경 ⓒ 궁능유적본부

 
그 이후 창경원은 일반 국민들에게도 개방되어 공원으로 사용되었고, 해방 이후 1970년대 후반까지도 창경원에서는 '창경원 밤 벚꽃놀이' 등의 행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 서울올림픽 준비를 하면서부터 비로소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되돌리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그때까지 남아있던 동물원은 과천의 서울대공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문정전 ⓒ 궁능유적본부

 
한편, 창경궁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역사적인 사건들이 발생한 궁궐이기도 한데요, 제19대 왕인 숙종 때 장희빈이 창경궁 통명전 앞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은 일이 있었고, 제21대 왕인 영조 때에는 창경궁 문정전 앞에서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힌 채 죽은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22대 왕인 정조는 1800년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하였습니다.
 

영춘헌 ⓒ 궁능유적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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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주요 건축물

 
 

홍화문

 

홍화문 전경 ⓒ 궁능유적본부

 
창경궁의 정문홍화문(弘化文)입니다. 경복궁의 광화문, 창덕궁의 돈화문, 경운궁(현재 덕수궁)의 인화문, 경희궁의 흥화문과 같이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의 이름에도 글자 '化'(될 화)가 들어있습니다. 홍화문의 ‘홍화’는 ‘조화를 넓힌다’, 즉 덕을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키고 널리 떨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홍화문 ⓒ 궁능유적본부

 
홍화문은 국왕이 직접 백성들을 만났던 곳이기도 한데요, 영조는 1750년에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기 전 홍화문에 나가 양반과 평민들을 만나 세금제도의 개편에 대한 의견을 들었고, 정조는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헌경황후)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 밖에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홍화문 ⓒ 궁능유적본부

 
한편, 다른 궁궐들과 달리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만 동향인데, 이는 창경궁의 남쪽으로 '종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대 왕의 신주를 모신 국가 사당인 종묘는 조선에서 가장 신성시 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창경궁의 정문을 낼 때 종묘를 피해 동쪽으로 낼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정전인 명전전과 주요 전각들도 동쪽을 향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명정전

 

명정전 전경 ⓒ 궁능유적본부

 
명정전(明政殿)창경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으로, ‘명정’은 ‘정사를 밝힌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명정전은 성종 때인 1484년에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때인 1616년에 재건되었는데, 현재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명정전 ⓒ 궁능유적본부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은 중층 규모이지만 명정전은 단층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창경궁이 정치공간이 아닌 생활공간으로 지은 궁궐이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명정전 ⓒ 궁능유적본부

 

문정전

 
문정전은 임금이 신하들과 회의를 열고, 국가정책의 의견을 나누던 편전(집무실)으로, 동향인  명정전과 달리 남향 건물입니다. 문정전은 편전이면서도 국상이 났을 때는 시신을 모시는 빈전이나 신주를 모시는 혼전으로도 자주 쓰였습니다. 
 

문정전 전경 ⓒ 궁능유적본부

 
문정전은 영조 때 사도세자가 뒤주 갇힌 채 죽은 비극적인 일이 벌어진 곳이기도 한데, 문정전이 빈전이나 혼전으로 쓰이게 된 데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도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문정전 전경 ⓒ 궁능유적본부

 

함인정

 
명정전 뒤편으로 복도가 연결되어 있고, 그 복도 끝에 있는 문인 빈양문(賓陽門)을 나서면 보이는 넓은 빈터에 높은 기단의 함인정(涵仁亭)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함인정은 임금이 문무 과거에 급제한 신하들을 접견하였던 곳이라고 합니다. 
 

함인정 ⓒ 궁능유적본부

 
함인정(涵仁亭)이라는 이름에는 '세상이 임금의 어짊과 의로움에 흠뻑 젖는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함인정 전경 ⓒ 궁능유적본부

 

경춘전과 환경전

 
함인정 뒤편으로 경춘전과 환경전이 있습니다. 경춘전은 대비(선왕의 왕비)의 일상 생활공간인 침전이었고, 환경전은 왕의 침전이었습니다. 원래 두 건물은 각기 행각을 두른 독립된 영역을 가졌었는데, 현재는 행각이 없어 두 건물이 한 공간 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경춘전과 환경전 야경 ⓒ 궁능유적본부

 
환경전은 1830년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갑자기 죽었을 때 그 시신을 모신 빈궁으로 쓰였는데, 이곳에서 불이 나서 경춘전, 양화당, 함인정, 숭문당, 영춘헌까지 피해를 입었고 효명세자의 시신이 있던 관도 겉이 탔으나 다행히 그 안의 시신은 손상이 없어 다시 염을 하여 장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이때 불탄 건물은 1833년 중건하였습니다.
 

환경전 전경 ⓒ 궁능유적본부
환경전 ⓒ 궁능유적본부

 
경춘전은 산실청(왕비와 세자빈의 출산을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으로도 쓰여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서 탄생했습니다.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내부에 '誕生殿'(탄생전)이라고 친히 쓴 현판을 걸었다고 합니다. 한편, 연산군 때 소혜왕후, 숙종 때 인현왕후, 순조 때 혜경궁 홍씨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고 합니다.
 

경춘전 ⓒ 궁능유적본부

 

통명전

 
통명전(通明殿)은 왕비가 일상생활하던 침전으로 내전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입니다. 통명전 가운데 세칸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 옆에 온돌방을 두어 왕과 왕비의 침실로 썼습니다. 통명전의 ‘통명’은 ‘통달하여 밝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통명전은 창경궁에 남아 있는 전각 중 유일하게 용마루(건축물의 지붕 중앙에 있는 주된 마루)가 없는 건물입니다.    

통명전 전경 ⓒ 궁능유적본부

 
통명전은 월대 위에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건물이 올려져 있고,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薄石)이 깔려 있습니다. 통명전은 제19대 왕인 숙종 때 장희빈이 사약을 마시고 죽은 장소이기도 합니다.
 

통명전 ⓒ 궁능유적본부

 

양화당

 
양화당(養和堂)은 통명전과 함께 내전의 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는데, 양화당 의 ‘양화’는 ‘조화로움을 기른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양화당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던 인조가 돌아와 거초로 삼았던 공간으로, 25대 철종의 왕비 철인황후 김씨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양화당은 1830년(순조 30)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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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당 전경 ⓒ 궁능유적본부
양화당 ⓒ 궁능유적본부

 

영춘헌, 집복헌

 

영춘헌과 집복헌 전경 ⓒ 궁능유적본부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은 창경궁의 생활 공간으로 사용된 건물이라고 합니다. 남향인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고,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쪽 방향에 5칸으로 연결된 서행각인데, 영춘헌의 영춘 봄을 맞는다라는 뜻이고, 집복헌의 집복 복을 모은다라는 뜻입니다. 
 

영춘헌 ⓒ 궁능유적본부

 
영춘헌은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자주 머물렀던 곳으로 독서실 겸 집무실로 사용하였고, 1800년 이곳에서 승하하였습니다. 집복헌은 사도세자와 순조가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집복헌 ⓒ 궁능유적본부

 

창경궁 내 전경

 
 

춘당지

 

춘당지 전경 ⓒ 궁능유적본부

 
창경궁 내에는 상당한 규모의 연못인 춘당지(春塘池)가 있습니다. 춘당지는 현재 두 개의 연못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원래는 뒤쪽의 작은 연못이 조선시대 때부터 있었던 본래의 춘당지(소춘당지)입니다. 
 

춘당지 전경 ⓒ 궁능유적본부

 
본래의 춘당지 앞쪽 큰 연못은 원래 왕이 몸소 농사짓는 의식을 행했던 내농포(內農圃)에 속한 11개의 논이 있었던 곳으로, 이곳에서 왕이 직접 쟁기를 잡고 소를 몰며 논을 가는 시범을 보임으로써 풍년을 기원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1909년 일제가 창경궁을 훼손할 때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유원지로 만들었습니다. 이후 1986년 창경궁 복원 때 춘당지 가운데에 섬을 조성하여 우리나라 전통양식에 가깝게 다시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소춘당지 ⓒ 궁능유적본부
춘당지 전경

  

대온실

  

대온실 전경 ⓒ 궁능유적본부

 
대온실(大溫室)은 1909년에 완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철골구조와 목조가 혼합된 구조체를 유리로 둘러싼 서양식 온실입니다. 준공 당시에는 열대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하였다고 합니다. 1986년 창경궁 복원 이후에는 국내 자생 식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대온실 전경 ⓒ 궁능유적본부
대온실 내부 ⓒ 궁능유적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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