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한 번쯤은 '전하, 종묘 사직을 생각하소서!' 이러한 대사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종묘와 사직, 많이 들어 보았지만 그 정확한 의미는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은데요. 오늘은 이 중 '종묘'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종묘 이야기
종묘(宗廟)는 조선과 대한제국 역대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제사를 지내는 국가최고의 사당입니다. 이렇듯 역대 왕의 신주를 모신 국가 사당인 종묘는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가장 신성시되는 공간이었습니다. 간혹 종묘에서 '묘'라는 글자를 보고 왕들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잘못 아시는 경우가 있는데요, 종묘에서 묘는 '무덤 묘(墓)'가 아닌 '사당 묘(廟)'로서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받드는 곳을 의미합니다.
1395년(태조 4년) 조선의 도읍을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정하면서 유교 이념에 따라 궁궐(경복궁)을 중심으로 좌측(동쪽)에는 종묘를, 우측(서쪽)에는 사직단(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을 세웠습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직후 태조(이성계)는 자신의 4대조에게 차례로 목조, 익조, 도조, 환조로 왕의 칭호를 올리고(추존 4대왕), 고려시대 수도였던 개경(개성)에 효사관(孝思觀)을 세워 그곳에 추존 4대왕의 신주를 모셨었는데, 1394년 조선의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이듬해인 1395년 한양에 종묘를 세우면서 추존 4대왕의 신주를 종묘로 옮겨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처음 종묘가 지어졌을 때에는 정전의 신실(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공)이 5칸이었는데, 1491년(세종 1년) 정종이 승하하면서 신실이 부족하게 되어 정전의 서쪽에 별묘를 세워 영녕전(永寧殿)이라 하고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겼습니다.
이후 조선시대 왕들이 승하하면 정전에 모셔졌다가 제사를 모시는 대수(4대)가 지나면 영녕전으로 옮겨졌었는데(조천), 그중에 공덕이 있는 왕은 '불천위'(不遷位)(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는 제도)로 정하여 영녕전으로 '조천'하지 않고 그대로 정전에서 계속 모시게 됩니다. 그 이후 조선시대 왕이 늘어나 점점 신실이 부족하게 되어 정전과 영녕전의 신실을 증건하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현재 정전에는 19칸의 신실이 있고, 영녕전에는 16칸의 신실이 있습니다.
종묘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과 함께 모두 소실되었다가, 1608년 광해군 때 다시 지어졌습니다. 한편, 종묘와 관련된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군이 서울에 들어왔을 때 종묘에 주둔하였는데, 당시 종묘에서 괴이한 일이 많이 나타나고 왜군 병졸이 죽는 일이 발생하자 '조선의 종묘에는 신령(神靈)이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고, 이를 두려워한 왜군들이 종묘를 불태우고 남별궁으로 옮겨갔다고 합니다.
종묘는 건축의 보편적 가치와 세계적으로 독특한 건축 양식을 지닌 의례공간이라는 건축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고, 종묘의 정전에서 행해지는 종묘제례(왕이 행하는 가장 격식이 높고 큰 제사)와 종묘제례악(기악과 노래, 춤을 갖추고 종묘제례 의식에 맞추어 행하는 음악) 또한 우리 문화의 독창성과 우수성이 인정되어 200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무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한편, 원래 종묘는 궁궐(창덕궁, 창경궁)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궁궐과 종묘 사이로 도로가 나면서 끊기게 되었고, 현재는 육교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요 건축물
정전
정전은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난 후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다음 신주를 옮겨와 모시는 건물입니다. 1396년(태조 4년)에 처음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 광해군 때 다시 지은 후, 두 차례에 걸쳐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정전을 종묘라 불렀고, 영녕전은 종묘와 구별되는 별묘였습니다.
정전 건물 전체의 모습은 일자형으로 우리나라 단일건물로는 가장 긴 건물로서, 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신주를 비롯하여 공덕이 있는 왕과 황제 19위와 왕비와 황후 30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습니다.
정전 건물 앞으로 가로 109m, 세로 69m의 넓은 월대가 있는데, 월대는 전체 바닥이 박석으로 깔려 있는데, 그 모습에서 정전의 품위와 장중함이 느껴지는 공간입니다. 월대 가운데에는 신문에서 신실로 통하는 긴 신로가 깔려있습니다.
영녕전
영녕전(永寧殿)은 1421년 세종 때 새로 지은 별묘(別廟)인데, '영녕'은 '왕실 조상과 자손이 함께 평안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영녕전에는 정전에서 옮겨온 왕과 황제 15위와 왕비와 황후 17위, 그리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영친왕)와 황태자비(이방자 여사)의 신주가 모셔져 있습니다.
영녕전 역시 정전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 광해군 때 다시 지은 후, 두 차례에 걸쳐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재궁
재궁(齋宮)은 왕이 머물면서 왕세자와 함께 제례를 준비하던 곳으로, 마당을 중심으로 북쪽에 왕이 머무르는 어재실, 동쪽에 세자가 머무는 세자재실, 서쪽에 어목욕청이 있고, 담으로 둘러져 있습니다. 왕과 왕세자는 재궁 정문으로 들어와 각 실에 머물면서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정제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전사청
전사청(典祀廳)은 종묘제례에 올리는 제수(祭需, 제례음식)를 마련하는 곳으로, 평소에는 제례에 사용하는 제기 등의 집기들을 보관하였습니다. 네모난 마당 둘레에 ‘ㅁ’ 자 모양으로 건물이 들어섰고 마당에는 음식을 준비하던 돌절구들이 남아 있습니다.
향대청
향대청(香大廳)은 제사 전날 왕이 종묘제례에 사용하기 위해 친히 내린 향·축문·폐백과 같은 제사 예물을 보관하는 곳입니다. 향대청 앞에는 행각이 길게 자리 잡고 있어 두 건물 사이에 남북으로 긴 뜰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망묘루
망묘루(望廟樓)는 종묘를 관리하는 관원들이 업무를 보던 곳으로, 종묘제례 전 임금이 머물면서 사당을 바라보며 선왕(先王)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정면 7칸, 옆면 2칸의 구조로 건물 중 두 칸은 누마루로 되어 있다.
1443년 세종 때 망묘루 옆에 사각형의 연못이 조성되었고 가운데 둥근 섬이 하나 있는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하다는 옛 사상에 따른 것입니다. 대부분의 궁궐 연못에는 소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여기에는 향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외대문
외대문(外大門)은 종묘 정문으로 또는 외삼문(外三門)이라고도 합니다. 외대문은 정면 3칸의 구조로, 궁궐 정문과는 달리 구조 형태가 소박하고 단순합니다.
조선 궁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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